제로의 경계에서 이상적 공간을 탐색하다
한국의 큐레이터와 비평가들 사이에서 박기원작가에 대한 평가는, 박기원 작가가 결코 그들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다는 아니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분명한 신뢰에 바탕하고 있다. <움직임(Move)>(1996), <부피(Volume)>(1997), <수포속으로(Come to Nothing)>(1998), <수평(Level)>(2002), <깊이(Deep)>(2003), <더운 곳(Hot Place)>(2004), <감소(Diminish)>(2005), <파멸(Ruin)>(2006), <가벼운 무게(Light Weight)>(2006), <진공(Vacuum)>(2008), <마찰(Friction)>(2008), <부유(Floating)>(2009), <에어 월(Air Wall)>(2009~2010), <파멸(Ruin)>(2009), <부메랑(Boomerang)>(2009), <배경(Scenery)>(2010), <희미한(Dim)>(2010), <울타리(Fence)>(2011), <낙하(Fall)>(2011), <엑스(X)>(2013), <뼈(Bone)>(2013), <플래쉬 월(Flash Wall)>(2014), <정원, 넓이 시리즈(Garden, Width Series)>(2014) 등 여지껏 그가 발표해 온 작품들의 제목을 보라. 이 단어들을 한 번씩 읖조리는 것만으로도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오감이 열려 무엇인가에 반응할 것 같은 착각마저 일어난다. 움직임의 감각, 부유의 감각, 부피와 깊이, 수평과 수직, 더운 것과 찬 것, 희미한 것과 분명한 것,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 부드러운 것과 딱딱한 것의 감각 등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느껴보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박기원은 어느 다른 작가도 시도해 보지 않은 형상화하기 매우 어려운 이런 주제들을 그만의 재료 사용법과 공간 구성 방식을 가지고 성공적으로 실현해 냄으로써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가의 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심지어 그가 사용하는 재료는 철사, 투명비닐, 에어 튜브, 스티로폼, 플라스틱 거울, 먹물 먹인 무늬목, 오일칼라로 붓질한 시트지 등 특별한 것이 아닌 평범한 산업용 원자재 혹은 그 재료에 작가가 약간의 손질을 더한 것들에 불과한 데도 말이다. 이것들이 그의 감성의 지대에서 어떤 물질감으로 나타날 지 또 어떤 공간성으로 구현될 지 전혀 예측 불가능한 예술적 속성마저도, 박기원이 계속해서 진행하고 있는 작업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감을 증폭시킨다.
올해의 작가전과 박기원
1995년에 시작되어 현재까지 지속되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을 발굴해 온 <올해의 작가전>은 한국 미술계에서 여러모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전시이다. 2012년 이 제도가 국제 심사위원에 의한 경쟁체제로 바뀌었지만, 이전까지 국립현대미술관의 큐레이터들은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일년에 한 사람의 작가를 선정하여 그의 작품세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전시를 기획해왔다. 오직 한 작가만을 선정하고(비교검토해야 할 경우, 두 작가를 동시에 선정한 해도 있었다.) '올해의 작가'명칭을 부여한다는 상징성때문인지 언제나 미술계의 지대한 관심을 받아 온 전시이다. 박기원은 구체제에 의해 선정된, 사실상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들이 자체적으로 선정한 마지막 작가로서 2010년의 '올해의 작가'가 되었다. 그의 예술적 가능성과 성취를 가장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올해의 작가전 2010>에서 그는 미술관의 제2전시장과 중앙홀의 약 1,800평방미터라는 거대한 공간을 <희미한>, <배경>, <에어 월>의 세 작품으로 구성하였다. 대형의 설치작업을 한 장소에서 그리고 그 연관성을 하나로 묶으면서 박기원 예술의 본령을 제대로 드러내었다고 평가 받았던 이 전시는 관람객의 적극적인 개입이 작품의 중요한 요소로서 작용하면서 대중적인 인기도 끌어 모았다. 우선 박기원은 그가 즐겨 사용하는 0.2mm의 가는 철사 2톤 가량의 분량을 풀어 헤쳐서 두 개의 큰 철사덩어리를 전시장 안에 설치했다. 어두운 조명으로 인해 윤곽선의 경계조차가 흐릿해진 그 이상한 물체는 제목 그대로 '희미한' 존재로서 전시장 안에 놓였다. 어떤 사람들은 수풀같다고 했고 다른 어떤 사람들은 거대한 머리카락 뭉치 같다고 했다. 아니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같아 두렵다고 했다. 작가는 새벽 안개 낀 공간을 걷는 것 같은 상황을 연출하고 싶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전시장 안의 어두운 분위기와는 상반되게 자연광이 한껏 스며드는 중앙홀에 작가는 중앙홀 내벽을 마감하고 있는 화강석 타일과 똑 같은 사이즈의 시트지를 재단하고 그 시트지 한 장 한 장을 푸른색의 대리석처럼 채색하여 부착했다. 그리고 <배경>이라 명명했다. 어떤 사람들은 꿈 속에서 본듯한 환상적 궁전 같다며 드러눕고 노래하고 춤을 췄다. 다른 어떤 사람들은 신기루 같아 들어가는 순간 자신조차 소멸될 지 모른다며 그 공간 안으로 들어 가는 걸 거부했다. 두 공간 사이 '벽' 이면서 '벽 아닌' 에어 월이 설치 되었다. 1,000x800x350m사이즈의 투명한 직육면체 쿠션 모양을 차곡 차곡 쌓아올려 만들어진 에어 월은 어떤 의미에서 박기원이 추구하는 예술적 지향점을 대변하는 상징물 역할을 한다.
'나는 장소(전시장)의 최소한의 변화로 전시를 하려고 생각했다. 전시장의 밝고 넓은 시원하면서도 깊은 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며, 그 속에 투명한 작품이 있고 또, 그 속에 사람이 있는 전시를 생각했다. 공중에 떠 있는 공기, 떠서 움직이는 공기,
그것은 "공기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심리적으로 가장 근본적이며 원형적인 제로(0)지점으로 회귀한 듯한 체험을
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보여주려고 한다. 즉 진공상태의 내면세계로 유도하는 것이 전시의 기본개념이다. 나는 장소
와 사람과 작품과의 공존관계를 유지하는 전시를 생각한다. 그것은 작품과 관객과 장소, 세 가지가 서로 "조화로운 균형상태"
를 보여주는 것이 "이상적인 공간"이라고 생각한다."(주1)
그가 투명한 재료를 사용하는 이유는 어떤 선입견 없이 공간을 공간으로 인식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최소한의 개입으로 공간의 특성을 드러내는 일, 그것이 장소와 사람과 작품과의 이상적 균형관계를 찾아내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작가적 태도는 그의 전시를 본 혹은 체험한 비평가와 미술사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비록 파생되는 의미망에 다시 갇혀 버리더라도 사물을 사물답게 인식시키는 박기원의 조형실험에 대해 이영준은 핼 포스터의 말을 빌어 '실재의 귀환(Return of the Real)'이라고 했고, 이지은은 박기원의 작업이 관람객들로 하여금 보다 확장된 경험의 폭과 파장을 제공함으로써 사회적 차원으로서의 소통이 미술의 새로운 지향점이 된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다고 주장했다. 고동연은 특히 2006년에 제작된 불탄 집을 연상시키는 <파멸>의 예를 강조하며 박기원의 작업이 제시할 수 있는 투명성과 불투명성, 창조와 파괴, 현실성과 초현실성의 양가적 차원과 그 해석의 가능성을 이야기하였다.(주2)
박기원의 작업세계를 가장 일목요연하게 설명한 사람은 이관훈이다. 그는 박기원 작가가 작업 혹은 작품에 임할 때 가장 주안점을 두는 요소는 '장소', '여백', '휴식', '제로상태'라고 보았다.(주3) 위의 작가노트에도 언급된 바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혹은 작가 자신까지도 사물과 공간과 그를 지각하는 주체를 진공 상태의 내면세계로 유도하기 위한 방법이 바로 '제로상태' 인데 이런 인식을 극대화하여 제시한 전시가 <올해의 작가전> 이었던 것이다. 박기원은 제로상태를 위해 전시공간을 청소하고 공간의 내피를 새로운 재료로 대치시키고 거기에 여백과 휴식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부여하였다. 작가는 이야기 한다 .
"결국 장소, 작품, 사람의 균형과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선 같은, 진공상태인 제로지점에서 자연스럽게 유도하려는게 작업에 대한 고민이다."
이런 그의 생각을 고스란히 담아 국립현대미술관의 중앙홀은 푸른 빛의 약간은 비현실적인 대리석으로 변모되었다. 박기원은 사람들이 약간은 혼란스럽겠지만 "새로운 공간"을 경험하고 "미궁"을 헤메듯이 그 공간을 탐색하며 삶에 대한 의미 역시 찾아가 보길 원했다. 그리고 철사 수풀이 있는 전시장에 들어와서는 풀밭을 한 바퀴 돌거나 쉴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여 그 과정에서 "끝없는 삶의 여정"을 반추해 보길 바랬다. <올해의 작가전>은 작가 박기원으로 하여금 예술과 삶에 대한 메타포를 자신이 선택한 재료와 공간 해석을 통해 제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형성해 주었다. "누가 미술관을 두려워하랴?(Who's Afraid of Museums?)"의 전시의 명제는 이렇게 선택되었다.
<넓이>와 <낙하>
박기원이 자주 쓰는 말 중 에 "팔의 솜털이 움직이 듯..."이란 것이 있다. 바람이 불면 사람 피부의 솜털을 자극한다. 순간의 찰나, 그 시간과 공간 안에 함께 있어던 사람들은 안다. 아무일도 없었지만 미세한 공기의 흐름이 그들의 신체를 감싸고, 살아 있는 감각을 다시금 일깨워주고, 그들의 호흡 속에 세상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들이 또한 스쳐 지나가는 것을...최소한의 자극의 세기, 그 역치의 스펙트럼을 자연스럽게 극대화 시키는 조형의 영역이 박기원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아주 경이롭고 신기한 예술의 세계이다. 그래서 박기원은 어떤 공간과 환경을 만나든, 그 공간을 강압적으로 변화시킨다거나, 조형적 개입을 의식적으로 서두른다거나, 과도한 주제의 설정 역시 목청 높여 이야기 하지 않는다. 박기원은 공간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작품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기보다 공간 속의 작품, 즉 공간과 작품이 중립적이길 원한다. 그는 이미 만들어진 환경이나 풍경은 그대로 있고, 미세한 공기의 흐름이 팔의 솜털이 움직이 듯 어떤 자극도 없어 보이며, 방금 지나친 한 행인의 기억할 수 없는 모습과 같은 최소한의 '움직임'이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길 원한다. 박기원이 '조금 달라진 환경을 통하여 조금 새로워진 장소를 보는 것'을 목표로 삼음으로써, 우리는 정말이지 하찮은 사선 테이프조차 사람들로 하여금 공간 속에서 완전한 자유로움이란 무엇인가를 일깨워주는 생각의 장소, <X>(부산시립미술관, 2013)로 탈바꿈한 것을 목격하고, 빨간 벽돌 건물 외벽을 장식한 <뼈>(오산 아모레퍼시픽미술관, 2013)의 유머러스함에 웃음 짓고, 철사벽과 헝겊공의 의미심장하지만 경쾌한 만남(베를린 이스트사이드 야외전시장, 2014)에서 소통과 단절, 분단과 통일의 메시지를 유출해 낼 수 있다.
최근 진행되고 있는 박기원의 프로젝트 중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넓이>(2007~2008)와 <낙하>(2011~2015)이다. 장지에 오일 칼라로 채색한 <넓이>나 여러 색깔 있는 비닐로 커튼을 만든 <낙하>는 얼핏 보았을 때 평면 작업으로 보이나 실은 이제까지 박기원의 공간실험이 보다 심화되고 압축된 결과의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하는 작품시리즈이다.
우선 <넓이>에서 작가는 종이(214x150cm 장지)조차 하나의 공간으로 인식하고 그 부피감을 시각화하기 위해 면을 분할하였다. 분할된 면 위로 층층히 쌓아 올린 여러 겹의 선들은 평면 작업 위에 공간성을 부여하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더욱 부각시킨다. 그래서 이 회화연작은 작가가 자연의 색조라 칭한 '그린', '블루', '브라운' 계열로 색상으로 연결됨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대표하는 색면회화나 단색화의 일종이 아니다. 그의 회화 작업은 지극히 물질적인 20개의 연작으로 구성된 미니멀아트의 유형이라고 볼 수 있다. 관객들은 먼저 하나의 큰 색면을 인지한 뒤, 그 세부를 가까이서 살펴볼 때 분리된 면과 그 위로 쌓여진 선들의 향연을 통해 '평면위의 공간'을 느낄 수 있다. 각각의 작품은 공간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비로소 하나의 완성된 작품이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작품은 장소와 관객, 그리고 작품으로 이어지는 역시 시각과 공간에 대한 박기원의 생각들을 전달해주는 입체적 레이어의 작품이다.
두 번째, <낙하>란 작품에서 작가는 평면 속의 공간성 탐구라는 주제에 "창"과 "벽"의 보조적 구조를 탐색함으로써 다가가고자 한다. 그는 <낙하> 작업을 위한 노트에 '침묵하고 정지한 넓은 창의 모습이 좀 더 경쾌하고 활기 있는 벽으로 보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가벼운 투명 칼라 비닐의 오버랩 현상으로 나타나는 자연스럽고 신비로운 움직이는 벽을 만들려는 계획.' 이라고 적어 놓으면서 '낙하'란 폭포를 간접적 연상시킨다고 말했다. LED 조명의 효과까지 발휘된 <낙하>시리즈는 박기원의 조형 실험이 이제 공간의 활성화 단계에 까지 이르렀음을 여실히 보여주고있다. 줄기차게 내리꽂히는 폭포의 운동에너지처럼 박기원의 작품은 이제 공간의 원형적 에너지로 작용하는 구조를 스스로 형성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최은주(경기도미술관장)
(주1) 2009년 2월 24일 작가노트
(주2)<2010년 올해의 작가: 박기원전> 도록
(주3) <2010 올해의 작가: 박기원전"을 본 후에 쓰여진 이관훈의 "박기원, 미술관에 바람을 쐬러 가다."라는 비평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