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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드 Grid

이교준, 홍승혜, 신수혁

2025.4.17 - 5.14

이교준, 홍승혜, 신수혁
그리드(Grid), 균형의 다중변주

아트프로젝트 씨오(대표 임은혜)는 2025년 만춘(晩春)의 에너지 속에서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하는 작가 이교준, 홍승혜, 신수혁이 참여하는 <그리드(GRID)> 전시를 개최한다. 그리드는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를 동시대 언어로 환원시킨 듯, 수직/수평의 좌표를 ‘비우고 채우는 회화여정’을 보여준다. 평면과 분할 속에서 캔버스의 물리적 한계를 탐구해 온 이교준, 리드미컬한 사각형의 그리드를 기하학적 패턴으로 승화시킨 홍승혜, 블루컬러의 농축된 구조를 그리드를 통한 초월공간으로 창출한 신수혁. 이들은 격자라는 균형의 다중 변주 속에서 현실의 시공구조를 뒤섞는 독특한 깊이를 보여준다. ‘그리드(Grid), 균형의 다중 변주’라는 제목은 단순한 형식적 구성을 넘어, 규칙과 자유, 통제와 우연의 긴장을 내포한다. ‘그리드‘는 기하학적 질서를 상징하는 동시에 현대미술에서 반복적으로 탐구된 주제로, 모더니즘의 냉철함과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 가능성을 동시에 함축한다. 이들 작가는 그리드라는 구조 속에서 무한한 변주를 시도하는 역동적인 실험을 감행한다. 실제 그리드는 미니멀리즘에서부터 디지털 아트에 이르기까지 예술사적 맥락에서 ‘보이지 않는 틀’로 기능해 왔다. 만약 그리드가 겹겹이 쌓인 레이어로 구현되었다면, 이는 현대 사회의 복잡한 시스템—디지털 네트워크, 도시 계획, 권력의 무형적 구조—을 은유할 수 있다. 제목이 암시하듯, ‘균형’은 이러한 견고한 체계 위에서 균열을 노출하거나 유희적으로 재배치하는 전략일 것이다.

이교준 작가는 건축의 에너지를 가진 회화를 통해, 반투명한 얇은 종이를 도면 위에 겹치는 듯한 ‘평면’과 ‘분할’을 통해 ‘스며드는 미감’을 보여준다. 층과 선이 ‘다층구조를 이루는 독창적 레이어’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프레임의 앞면이 결과라면 이를 보완하는 캔버스의 뒷면에 배색을 더하는 독특한 방식이다. 한국에서는 이를 ‘배채법’이라고 하는데, 비단 그림의 뒷면에 채색하여 그것이 앞면에 반투명 상태로 비치게 하는 채색 방식이다. 실제로 작가는 이러한 한국의 정서를 가미하기 위해 린넨천을 사용해 박락(剝落)을 막고 색의 미묘한 변화를 드러내는 방식을 적극 활용한다. 관계 미학의 정초를 숙련된 미감으로 재해석한 작가 작업들은 캔버스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물어 여백과 환영, 실제와 가상을 확장하는 ‘가능성으로의 여정’을 실험한다.

홍승혜 작가는 세상을 관통하는 시각 원리와 규칙을 컴퓨터 픽셀로 재해석한 작업을 바탕삼아, 다층의 레이어를 형성해 왔다. 실제 작가는 네모의 그리드를 탈피한 다채로운 모양새의 도형을 ‘유기적 기하학’ 속에서 확장해 왔다. 안정상태인 ‘기하학’ 앞에 메타(변화)를 나타낸 ‘유기적’이란 수식어를 가미함으로써, 모순을 극복-진화하는 방식을 ‘이상적 창작’의 조건으로 제시한 것이다. 유기적인 기하학의 이율배반을 극복하는 독특한 작업 방식은 아방가르드의 유희 속에서 자신만의 리드미컬한 균형을 창출한다. 규칙을 넘어서는 변주의 리듬 속에서 작가는 동일성과 차이의 경계를 넘어설 것을 종용한다. 변주의 주체가 작가뿐 아니라 관객이나 환경까지 확장될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신수혁 작가는 컬러가 가진 다층의 힘을 기하학을 가로지른 균형의 그리드 속에서 정의한다. 가로와 세로가 교차하는 그리드의 감각은 추상적 패턴들로 구성되지만, 그림의 형상 중 동일한 것은 하나도 없다. 수직/수평의 에너지를 그어내는 작가의 규칙은 매일의 과정 속에서 새롭게 탄생하며, 몰입 속에서 만들어지는 ‘지금-여기의 각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평면을 향한 끊임없는 중첩과 축적의 반복은 명상과 독백의 정화(淨化/靜話)이자, 도시 건축(혹은 문명)의 다층구조를 연결한 평면파사드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신수혁의 그리드에는 공기층을 압축한 평면의 깊이가 자리한다. 농축된 빛색의 추상화 과정은 첫 점으로부터 시작해 마지막 최종점까지를 연결한 ‘들숨과 날숨의 수행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드, 균형의 다중변주’는 규범과 예측불가능성의 공존을 탐구하는 선언적 제목이다. 그리드라는 명백한 제약 안에서 변주가 창출하는 무한한 가능성은 예술적 창조의 본질을 환기시킨다. 말 그대로 균형은 통제가 아니라, 오히려 통제의 틀을 의식하고 그 안에서 춤추는 능동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전시는 세 작가가 구축해 온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그리드’ 속에서 재조명함으로써, 한국추상미술의 다양한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한다. 직조된 질서와 다층의 공감각을 통해 이성과 감성의 관계성을 보여주는 전시에 큰 관심을 기울여 주길 바란다.


안현정 (미술평론가, 예술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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